수많은 점들 속에서 찾는 존재의 정체성
환기 미술관에서 내가 감상했던 김환기 화백의 그림은 그의 초기 그림의 주제였던 달항아리들을 그린 그림과 점면화(점을 찍어서 그린 그림)으로 구성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회생활로 바쁘고 분주했고 화가의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가지고 있던 때였기에 어쩌면 기본적인 지식이나 해박한 조예와 상관없이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감상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예를 들면 작품의 배경이나 화가의 생애, 작품가...등
벽 하나를 거의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그림들이 점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을 보며 왜 선에서 점으로 옮겨갔을까? 궁금했었습니다.
점 하나하나의 색감은 신비롭고 영롱하게 이름다웠지만 선, 획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나에게는(동경은 자신이 잘 하지 못하는 부분이기에 크게 확대되는 면이 있지요~^^) 점면화법으로 그린 그림에 대해 크게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수억 개, 수조 개(?)... 어쩌면 수치로 불가능한 똑같은 점을 찍으면서 화가는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의 점을 찍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무심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그 많은 점들을 반복해서 찍는 자세만으로도 몹시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점들 속에 내가 존재하지만 점과 점들 사이사이 빈 공간에도 존재하고 아직 찍지 않은 점을 향해가며 움직이는 내가 존재하고 있기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업은 나에게 도달하기 위한 행위가 아닐까? 하는.
간격 사이사이에 떄로는 고통이라는 현실도 있겠지만 고통을 지나면 기쁨과 희망이라는 느낌과 가능성들로도 채워지겠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동일한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겠고 그 그림을 소장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요?
동양, 한국, 집단의식 속의 개인
1961년, 『사상계』라는 잡지에서는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해오던 화백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하더라도
내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철두철미한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 밖에 없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 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파리라는 국제경기장에 나서니 우리 하늘이 더욱 역력히 보였고 우리의 노래가
강력히 들려왔다. 우리들은 우리의 것을 들고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것이 아닌
그것은 틀림없이 모방 아니면 복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편편상(片片想)」중에서
동양 사람, 한국 사람이라는 민족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결국 그 민족에 속해 있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겠지요. 자신을 발견하는 것.
수 많은 점들의 무리가 동양, 한국이었다면 그 점들 각각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세포처럼 작고도 거대한 하나의 유기적인 ‘나’라는 세계를 찾아가는 작업이 되지 않았을까 유추해 봅니다.
끝없이 추구했던 예술작품은 결국 자신의 근원을 알아가는,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작품의 이름이 ‘우주’입니다.
왜 이 우주라는 작품에 열광하는가 궁금했었는데 그 우주의 소용돌이 안에 발견하고 싶은 것은 ‘나’라는 우주, 근원으로 찾아들어가는 나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합니다.
푸른 색의 심오한 우주를 바라보며 희망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현실의 나를 잊어버리는 망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 안에서 찾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나에 대한 확인이자 조금 앞선 나에 대한 미래이자 미래에 닿기까지의 과거 또한 포함되어 있겠지요.
예술과 명상의 공통점 ; 변화
예술과 명상은 닮았습니다. 예술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행위이자 결과물이며 주체와 객체 상호간에 영향력을 주고 받는 매개체라고 한다면 명상은 보다 직접적으로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보며 찾아가는 방법입니다.
한 음 한 음 나열하고 쌓아가며 아름다운 소리를 찾아가는 음악은 시간과 감정의 찰나를 공유하고 하나되는 매개체가 될 수 있고 미술은 선과 선, 색과 색, 점과 점이 모여 형태를 이루고 내면의 심상을 표현하여 외부와 상호적인 접속을 공간 속에서 빚어냅니다.
명상은 한 숨 한 숨 쌓아가며 호흡을 통해 내 안과 밖을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합니다. 덜어내기도 하고 채우기도 합니다.
물질이 자체적으로 혹은 다른 물질을 만나 서로 작용하면서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하는 화학반응을 할 때 기존의 결합방식이 파괴되고 생성되기 시작합니다. 최소 단위의 원자들의 재배치가 일어나듯이 훌륭한 예술과 명상과의 접속은 내면의 화학반응을 일으켜 내 안에서 재배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나노 단위의 재배치는 크고 작은 변화를 이끌어 내게 되는데 그 계기가 저에게는 '예술'과 '명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막연하다면 나를 움직이는 것(고통도 포함), 궁금하게 하는 것, 가슴 뛰게 하는 것! 그 중에서 찾아보시면 되지 않을까요?^^